어릴 적 ‘피키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유학길을 떠났다. 가족도 없는 타국에서 학교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현실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쳤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은 가난한 유학생의 꿈을 외면했고 결국 상처와 좌절을 비켜 갈 순 없었다. 그렇게 멍들은 ‘피키소의 꿈’은 양귀비의 오묘한 색으로 캔버스를 가득 메우며 선명해졌다. 양귀비의 꽃말처럼 나의 그림이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길 바란다는 강현자 작가를 만났다.
# 그림과의 인연은? 시골에 있는 작은 일광초등학교 4학년 때 작고하신 한동철 선생님이 미술부 선생님이셨어요. 저는 그림을 되게 못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남아서 그림 그리게 하셨어요. 어느 날은 하루에 10장도 그리고 그리면 또 숙제도 내주시고 똑같은 그림만 그렇게 반복해서 그렸어요. 그리고는 대회에 나가서 연습했던 그림을 똑같이 그리라고 하셨지요. 아마도 연습을 시키신 것 같아요. 그때부터 그림에 흥미가 붙은 거죠. 나름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리고는 처음으로 알게 된 화가가 피카소였어요. 나도 피카소처럼 유명해져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막연하지만 작은 꿈이 생겼죠. 그렇게 어린 저는 스스로 ‘피카소의 꿈’을 키우며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그런데 막상 고등학교 때 입시 준비를 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상 학원을 못 다녔어요. 하지만 전문대 디자인과는 정밀묘사만 해도 갈 수 있었기에 한 두 달 정밀묘사를 준비해서 결국은 입학을 하게 되었어요.
# 어려운 형편에서 일본 유학? 대학에서 교수님하고 학우들 몇 명이 방학 때 여행 겸 일본으로 연수를 갔는데 그때 결심했죠. 그때부터 한국에 들어와서 오로지 유학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했어요. 4년제 편입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10개월 동안 밤낮으로 했어요. 우선 일본에 가서 살 수 있는 생활비와 등록금 등 필요한 돈을 벌었어요. 그리고 일본으로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떠난 거죠. 22살 때 떠나서 98년까지 타마미술대학에서 약 3년 정도 힘든 유학 생활을 했죠.
# 유학 생활은 순탄했나요? 지금 돌이켜 보면 열정도 넘쳤지만 무모함도 있었던 것 같아요. language 과정을 밟고 본교에 입학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어요. 특히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죠. 일본에서 6개월이 지나니까 모아둔 생활비도 떨어지고 그래서 다시 알바를 했어요. 하지만 language 과정에서는 비교적 여유가 있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버텼는데 본교에 입학하고서부터는 더 힘들었죠. 아르바이트가 매일 밤 12시에 끝나고 새벽 1시부터 5시까지 과제하고 나까노에서 학교가 있는 하찌오찌로 등교하려면 아침 7시에는 집을 나서야 했죠. 2시간 거리였으니까요. 하루에 두 시간 이상은 잠을 못 잤어요. 얼마간은 정신력으로 버텼지만 학기가 끝나갈 무렵 물리적, 정신적으로 한계가 왔어요.
# 귀국을 하게된 이유는? 지금 기억으로는 방학을 주기 전 마지막 과제를 위해서 일주일 동안 밤을 꼬박 새우면서 건강에도 문제가 생겼어요. 너무 졸렸지만 학교 끝나고 알바를 마치고 오면 한잠도 못 잤던 것 같아요. 그렇게 비몽사몽 일주일을 버티고 마지막 과제를 냈어요. 문제는 그 다음부터 잠이 오질 않았어요. 계속되는 불면증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체중은 10kg이나 빠졌죠. 건강도 나빠지고 더는 버틸 수가 없었어요.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왔죠. 외국에서 너무 외로웠고 고향에 계신 엄마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식구들이 제 모습을 보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여권을 뺏고 학교에는 오빠가 일본의 학교 선배한테 전화를 해 자퇴서를 내게 했어요. 그게 마지막이 됐고 언젠가는 꼭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잘 되진 않았어요. 결국은 20년 만에 신혼여행으로 다녀왔어요.
# 그림에서 양귀비꽃의 의미는? 일본에서 몸도 마음도 지쳐있을 때 집 근처 공원을 찾았어요. 그곳에선 봄꽃이라고 하는 뽀삐가 있어요. 한국의 양귀비꽃하고 같은 과인데 정말 예뻐요. 그날도 나의 처지를 비관하며 엄청 우울했죠. 나는 왜 돈이 없을까? 학비가 없어 혼자 힘으로 하는 게 너무 힘들다 등등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꽃을 보는 순간 내가 일주일간 우울했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거예요. 그 꽃을 보고 나름대로 힐링이 됐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작품 속에는 뽀삐가 들어가요. 그 꽃을 머리에 장식하면 기분 전환이 되고 인물들의 의상에 넣으면 패턴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여백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요. 양귀비 꽃말이 위로 위안이라는 뜻이 있대요. 내 그림 보면서 그냥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고 상실감을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 귀국 후의 생활은? 한국에 와서 조금 쉬다가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어요. 2년 정도 회사를 다녔는데 매일 밤새는 일이 허다해요. 디자인 회사는 시간에 쫓기는 작업들이 많아 야근을 하다보니 그림을 못 그리는 거예요. 그래서 사표를 내고는 무역회사에 들어갔어요. 일본어를 잘하니까 해외 영업부에 있었죠. 공항에 가서 바이어 픽업하고 공장에 들어가서 번역 통역하고 저녁에는 접대하고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나면 12시가 넘죠. 그리고는 새벽 3시 4시까지 늘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시골에 계신 엄마가 치매에 걸려 서울 근교 요양원에 얼마간 모시게 되었어요. 회사 다니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를 보러 가곤 했죠. 갈 때마다 혼자 있는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오빠들한테 내가 시골에 내려가서 엄마를 모시겠다고 했어요. 2007년도에 시골로 내려와 엄마 모시면서 그림을 마음 놓고 그릴 수 있었죠. 덕분에다음 해 2008년도에 개인전 사랑꽃展 을 열게 되었어요.
#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일본 유학을 갔잖아요. 근데 사실은 경제적인 게 제일 힘들었거든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에 합격을 했는데 돈이 없었어요. 등록금이 120만엔 우리 돈으로 천이백만 원 정도 하는데 모아놓은 돈은 이백만 원밖에 없었어요. 부모님에게는 손을 벌릴 처지도 안되고 저한테는 현지에서 만난 지인들밖에 없는데 난감했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도 없는 일이고....그때 등록금 천만 원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현지에서 친한 언니와 아르바이트 하는 회사 부장님이 나눠서 빌려주셨어요. 그 후로 열심히 일해서 돌려드렸고 한 분은 150만 원 갚았는데 남은 돈은 안 받으시고 모아서 다음 학기 등록금 내라며 돌려주셨어요. 가족 아닌 사람들한테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 때 너무 행복했고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때 저는 처음 생각했어요.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있구나. 나도 언젠가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느꼈죠.
# 인사동에서 열리는 ZERO HUNGER展 은? 열 번째 맞는 이번 개인전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특히 이번 전시기획의 동기부여를 해주신 유엔의 임형준 소장님이 계세요. 우연히 SNS를 통해 20여 년 만에 연락이 되었어요. 20대 젊은 나이에도 전 세계의 가난한 나라들을 배낭 하나 짊어지고 돌아보며 그때부터 유엔에 들어가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는 것이 인생의 큰 목표라고 하셨는데 세월이 흘러 정말 유엔의 소장님으로 계시며 ‘빈곤퇴치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고 나의 흐릿했던 ‘피카소 꿈’이 선명하게 되살아났죠. 유엔에서 ‘먹을 것’ 걱정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2030년까지 ‘제로웨이스트 제로헝거’ 캠페인을 진행 중인데 이 소식을 접하고 어쩌면 내가 어려서 꿈꿔왔던 일을 실천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ZERO HUNGER 展을 기획하게 되었어요. 또한 전시 중 판매되는 기금은 모아 유엔에 전달하고자 이 전시를 열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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