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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미⑰] 이제는 보원사지 복원이다.:서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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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미⑰] 이제는 보원사지 복원이다.

서산신문 | 기사입력 2022/05/02 [07:40]

[서산미⑰] 이제는 보원사지 복원이다.

서산신문 | 입력 : 2022/05/02 [07:40]


서산의 바닷길과 산길…깨달음의 명상길

 

서산신문은 보원사지에 대한 역사·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보원사지의 복원과 함께 지역 고유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데 도움을 제공하고자 답사기를 연재한다.

 

서산에는 바다와 육지를 잇는 길이 있다. 서산의 바닷길과 산길로 이어지는 길인 만큼 깨달음으로 이르는 명상로가 있다. 서산의 바다와 산을 잇는 길을 걸어보면 산 위에서 바다를 볼 수 있고 그 산을 넘으면 바다에 닿을 수 있다. 거꾸로 바다 위에서 산을 볼 수 있고 그 해안선에 배가 닿으면 산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런 까닭에 산 위에 펼쳐진 바닷길이자 바다 너머에 펼쳐진 산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산의 길은 이처럼 바닷길과 물길이 만나는 지리적 특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했다.

 

서산의 길은 중국 남조의 선진문명이 유입되던 무역로인 동시에 우리의 구도승들이 깨달음을 얻고자 배에 오르던 길이었던 것이다. 이 길의 수없이 많은 절터들은 백제, 통일신라, 후삼국,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천년의 향기가 그대로 깃들어 있는 불교문화의 보고인 것이다. 길 위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절터들이 중국의 선진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뒤 창조적으로 승화한 현장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조성된 것도, 화엄사찰 중 하나인 보원사가 창건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산의 바다와 가야산은 문화와 문물이 교차하는 해상 네트워크의 본거지였던 것이다. 바다를 열린 공간으로 볼 때 바다 공간은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한없는 상상력과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모험심과 진취성을 불러일으키며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이해하게 하고 우리 문화만이 최고라는 문화 자폐주의에 빠져들지 않게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의 폭과 역량은 자연히 확대된다.

 

흔히 백제를 가리켜 문화대국 혹은 해양강국이라고도 한다. 해양강국인 까닭에 문화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물자와 서비스 및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사람들은 외부 세계와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항구는 바다와 섬, 그리고 육지를 서로 연계함으로써 사람과 물자 등 정보를 교류하는 것이 가능한 교통의 요지이면서 정보의 집결지이다. 더욱이 항구들 사이에 있는 교통네트워크가 형성되어 하나로 열결된다.

 

서산의 길이 선진문명이 유입되던 길이었던 까닭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함께 묵었다는 움막이 가야산에 있고 의상대사가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화엄사상을 전하기 위해 귀국했던 길이 서산의 길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천년의 역사 동안 수많은 사람이 걸어갔을 서산의 길. 그들은 왜 집을 나와 산을 넘고 바다로 향했던 것일까?

 

그 해답은 부처님이 안락한 왕궁을 나와 금은보화가 장식된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구도의 길을 나선 것이나, 화엄경에 등장하는 선재동자가 지위 고하를 막론한 53선지식을 만난 끝에 깨달음을 얻은 것이나, 경허선사가 전염병에 걸려 길 위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서 마음을 돌려 정각을 이룬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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